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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예술

다음스토리볼 사람책 : 처음이라 서툰인생 - 철들고 그림 그리다

일상예술가 2015. 2. 3. 19:37



다음 스토리볼 사람책의 인터뷰 입니다. 

http://storyball.daum.net/episode/11194







다음 스토리볼 사람책 35회 : 처음이라 서툰인생 - 철들고 그림 그리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참 철들고 나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작가 정진호입니다. 


평소 미술이나 그림에 관심이 있었냐고요? 관심이야 있었죠,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그림을 그리게 될 줄은 몰랐어요.

12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주구장창 코딩만 하던 개발자였거든요.


계속 일할 수 있을까?






대기업, 벤처 그리고 글로벌 회사 야후에서 12년간 개발자로 일했습니다. 

일도 그럭저럭 재밌었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았지만 10년째 되던 해에 깨달았어요. 


‘아, 개발자로 계속 일하는 건 힘들겠구나!’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나 기술을 익히는 건 어렵지만 재미있어요. 미국 본사에만 가봐도 백발의 개발자가 열심히 코딩하며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내곤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40대가 넘어 관리자가 아닌 실무자로 일하는 개발자는 거의 없는데다 5년을 일하든 10년을 일하든 개발자라는 게 늘 ‘을’의 입장에서 일해야 하다 보니 조금 불안했죠. 사실 어딜 가나 직장인의 가장 큰 고민은 ‘계속 일할 수 있을까?’인 것 같아요. 


나를 차별화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 ‘교육’을 하면 참 잘할 것 같단 생각이 스쳤어요. 

개발이란 게 워낙 특화된 업무일 뿐만 아니라 야후는 야후만의 고유한 툴이나 플랫폼이 있어서 

신입이든 경력이든 야후에 들어오면 처음부터 다시 인프라를 익혀야 해서 다들 고생이었거든요. 

그래서 전 미군에서 신병훈련소를 칭하는 ‘부트캠프’를 야후에 만들었어요. 

부트캠프 과정만 들으면 누구나 일을 쉽고 편리하게 할 수 있게 말이죠. 


기술에서 사람으로





다른 개발자들이 일을 쉽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10년 넘게 한 개발보다 더 재밌더라고요. 내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동료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본인의 재능과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게 의미 있게 느껴졌어요. 


마침 마인드맵 공인 자격증도 따서 아이디어를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사내 강의를 열게 됐고, 이게 회사 밖으로도 입소문이 나서 공개 과정을 열게 됐습니다. 이 강의가 몇 달 뒤 개발자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기업문화 담당자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줄은 미처 몰랐지요.



12년 동안 했던 개발을 접고 SK컴즈의 기업문화팀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됐습니다. 어떤 제도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직원들이 더 편리하고 또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지를 하루 종일 공부하고 고민하고 실행하는 일이었죠. 회사에 모든 직원들이 행복하려면 우리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고 믿었어요. 기술도 좋지만 어떻게 하면 행복한 직장인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행복한 직장인이 될까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출근하고 일하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요. 월급 받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니까요?


철들고 그림 그리다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 후 워크숍을 갔다가 ‘나만의 버킷리스트’ 적어보는 프로그램을 하는데 순간 ‘그림 그리기’가 생각나더군요. 실은 몇 해 전 미국 야후 본사에 출장을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한 외국인이 혼자 공항 구석에 조용히 앉아 손바닥만 한 수첩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보통은 자거나, 음악을 듣거나, 스마트폰을 하거나, 아주 가끔 책을 읽곤 하는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더라고요. (그림을 썩 잘 그리진 않았지만요^^) ‘부럽다, 나도 언젠가 꼭 그려봐야겠다’라는 생각만 하고 한국에 돌아왔고, 그림은 그렇게 잊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떠오른 거예요.





훗날 그 외국인처럼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린 그림이에요



기왕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든 김에 학원에 다녀봐야겠다 싶어 홍대 앞으로 갔습니다. 몇몇 미술학원 앞을 서성이며 걸려있는 그림을 보니 딱 세 가지 느낌이 들더라고요. 


하나, 그림이 엄청 크네? 저거 다 그리려면 엄청 힘들었겠다!

둘, 무슨 그림들이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워?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은 꽤 고통스러웠겠는데? 

셋, 그림들이 다 비슷비슷하네. 깨진 연탄, 찌그러진 페트병, 썩은 과일…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그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으레 그리거나 자기의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그림을 그렸겠구나!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던 저는 주저 없이 뒤돌아서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곤 다음 날 서점에 가서 스케치 교본을 하나 샀어요. 노트도 하나, 펜도 하나 샀고요. 그렇게 저는 그림 그리기를 혼자서 그리고 스스로 시작했습니다. 




2011년 4월 23일, 교본대로 똑같이 그렸어요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점심시간 자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하루 30분씩 교본에 있는 그림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기 시작했어요. 책에 있는 그림을 똑같진 않더라도 어떻게든 비슷하게 그렸어요. 그렇게 한 달쯤 그렸을까? 그제야 손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더라고요. 


그다음부터 주변에 있는 걸 그리기 시작했어요. 컵, 핸드폰, 사원증… 손바닥만 한 물건을 선으로 그렸죠. 두어 달 그리고 났더니 어지간한 건 어설프게 따라 그릴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리곤 석 달쯤 지나니 색을 칠하고 싶더라고요. 색연필을 사서 3개월 동안 색을 칠했어요. 아이들에게 밤마다 읽어주던 동화책에 나온 그림도 엄청 따라 그렸어요, 이러다 동화작가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2011년 5월 6일, 색연필로 따라 그린 동화책의 한 장면






색연필로 주먹만 한 그림은 그릴 수 있지만 큰 그림은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수채화를 시작했지요.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심지어 중간에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입원실에 챙겨갈 정도로 열심히 그렸어요. 그렇게 제가 2년 가까이 그린 그림을 모아 ‘철들고 그림 그리다’라는 책도 내고 개인전도 가지게 됐습니다. 직장을 계속 다니고 있는 상태로요. 



그림 그리는 게 저 스스로 즐겁고 행복했지만 직업은 결코 아니었어요. 그림만으로 먹고살 수는 없거든요. 


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면 1년에 대략 250시간 정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작품으로 따지면 20~25점 정도가 나와요. 이 작품들로 개인전을 열려면 액자도 사야 하고 대관도 해야 하고 도록이나 엽서도 만들어야 하죠. 그림이 팔리더라도 배송까지 마치고 나면 제 수중에는 1백만 원 넘직이 남게 돼요. 미대를 나오지 않은 비전공자가 그림을 그리는 일로 버는 돈은 결국 시간당 5천 원 정도가 되는 거죠. 


그렇기에 그림 그리는 건 직업으로는 결코 삼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저에게 그림 그리는 것으로 예상치도 못한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정차장에서 정작가로의 변신






회사가 경영난으로 희망퇴직자를 받게 되자 저 역시 보통의 40대 직장인과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CEO나 임원이 아닌 이상 몇 년 안에 회사를 나와야 하는데 아직 아이들은 어리고 모아놓은 돈은 많지 않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일이 재밌더라도 저 역시 다른 직장인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불안했죠. 마침 감사하게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고 저는 퇴직 후 이직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이직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요. 퇴직금으로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뭔가 새롭게 시작해야 했어요. 아내와 아이가 둘이나 있는 가장이니까요. 그간 계속 그려왔던 그림과 몇 권 출간했던 책 덕분인지 강연 요청이 꾸준히 들어왔기 때문에 비주얼 싱킹 워크숍을 공개강좌로 열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운영하던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다음날 블로그에 들어가 봤더니 하루  만에 마감된 게 아니겠어요? 첫번째 강좌가 열리기도 전에 두번째 강좌도 마감됐고요. 어안이 벙벙했어요. 


저는 직업 강사도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이었잖아요. 다른 게 있다면 꾸준히 뭔가를 지속했다는 것뿐이었어요. 블로그를 14년을 했고, 직접 쓴 책과 번역서를 합쳐 13권의 책을 냈으며, 5년 가까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죠. 만일 제가 처음부터 돈을 벌고자 시작했다면 지금까지 이어지긴 어려웠을 거예요. 그저 스스로 재미있는 일에 의미를 찾았고 또 다양한 방면으로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작가’라고 불리고 있더라고요.




1인기업가로 다시 태어나다



제가 모시던 팀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었죠. 


"모든 직장인의 미래는 자영업자 아니면 1인 기업가다!"


저 역시 평생 회사를 다닐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어요. 다르다면 비교적 일을 재미있게 즐기는 편이었고 또 혼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오래 했다는 것뿐이었죠. 그리고 그 힘으로 저는 저 스스로를 고용한, 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기업인 ‘1인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일할 때와 1인 기업가로 사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뭐냐고요?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제 힘으로 해야 합니다. 콘텐츠 기획, 마케팅, 디자인, 회계 등등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말처럼 혼자서도 정말 잘- 해야 합니다. 이게 재미면 재미고 고통이면 고통일텐데 저는 다행히 즐겁게 하고 있어요. 


그리고 시간 관리를 제 맘대로 할 수 있습니다. 출퇴근 시간과 장소가 정해진 직장인과 달리 1인 기업가는 언제 어디서나 업무를 할 수 있으니까요.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어디서나 일을 볼 수 있기에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늘었어요. 그렇다고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 건 아니예요, 오히려 일하는 시간은 더 늘었습니다. 워크숍이나 강의를 준비해야 하고 중간중간 책도 써야 하고 그림도 그려야 하니까요. 


단,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저를 위한 시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회사를 그만둔 뒤, 재미와 균형을 얻었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1인 기업,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 말하진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요.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10년 일했다고 생각해봅시다. 1인 기업가로 회사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전문가를 찾아줄까요? 저의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입니다. 10년의 모든 경험을 녹여서 지속적으로 팔 수 있는 콘텐츠가 없다면 당연히 후자겠죠. 10년 동안 전문가였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6개월 동안 팔 수 있는 게 분명한가가 중요해요. 아무리 인기 있는 콘텐츠라도 3년 이상 버티긴 힘들어요.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계속 만들면 되겠지 생각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재미있어하고 행복해지는 일을 꾸준히 오래 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장 행복하게 그림 그리는 사람





2014년에 그린 ‘미호@자유의 언덕8번지’ 사진 속 이곳은 저의 3번째 개인전을 연 곳이기도 합니다.


“가장 아끼는 그림이 뭔가요?” 


사람들은 제게 묻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없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순간 모든 행복을 다 느끼고 그림을 다 그리면 이미 그 그림을 떠나보냅니다. 2시간 동안 밑그림을 그리며 이 공간과 분위기를 충분히 다 느끼고, 8시간 동안 채색을 하면서 미처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느끼죠. 


대한민국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 정말 많죠? 하지만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까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전 정말 행복하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꿈은 30년 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개인전을 30번 하는 게 또 하나의 꿈이랍니다. 지금까지 3번 했으니 이제 27번만 더 하면 되겠죠? ^^


저는 그림을 그리는데 재능보다는 재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오래 그리려면 재능이 있으면 좋습니다. 재능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요? 일단 그려봐야죠! 1만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1천 시간쯤 그리다 보면 스스로 깨닫게 될 거예요, ‘아- 내가 죽을 때까지 취미로 그릴 수 있겠다!’


저처럼 철들고 그리기 시작한 사람도 평생 그리는데 여러분이라고 못할 이유 있나요? 저랑 같이 그림 한 번 그려봐요! 세상을 달리 보는 새로운 눈을 제가 선물해드릴 테니까요!